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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을 대변한 언어 예술가

<게리 힐: 찰나의 흔적>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 4, 5전시실 | 2020년 02월호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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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인간을 드러내는 신체 그리고 인간이 속해있는 어떤 공간의 형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언어 예술가’ 게리 힐의 개인전 중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가 열린다. 2019 국제전 <게리 힐: 찰나의 흔적>이 지난 11월 26일부터 2020년 3월 8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 4, 5전시실에서 개최된다.
게리 힐(Gary Hill)은 1951년 미국 출생으로 초기에는 조각가로 활동하다 1970년대 초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영상과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2년 제9회, 2017년 제14회 카셀 도큐멘타 등의 국제전에 참가하였으며, 영상과 설치미술로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게리 힐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인 언어와 신체 그리고 인간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인간이 속해있는 공간의 형태 등을 주제로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작가를 규정하던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닌 열린 해석이 가능한 ‘언어 예술가’로서의 측면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영문 제목인 ‘모멘툼스’는 Moment(찰나), Momentum(가속도), Tomb(무덤)의 합성어로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소리는 시간에 따라 결합, 분리,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양상에 착안하여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 안에 이미지와 언어가 미끄러지는 찰나에 다른 이미지와 언어가 짝을 이루며 그 뒤를 잇는다. 그 ‘찰나’에 소멸된 이미지와 언어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떤 ‘장소’, 이를테면 무덤으로 표현되는 가상의 공간을 점유하며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을 바탕으로 게리 힐의 작품을 장르로 구분한다면 ‘비디오 아티스트’보다는 언어, 이미지, 공간 등에 관한 열린 해석이 가능한 ‘언어 예술가’가 적합하다.
이번 전시는 특정 매체나 틀에 갇힌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 현대 미술의 정신을 대변하는 ‘언어 예술가’로서의 게리 힐을 조망한다. 그의 일생에 걸친 사유의 결과물을 통해 열린 상태로서의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테크놀로지, 가상과 실재 공간에 대해 고찰하는 대표 작품 24점을 소개한다.
<잘린 파이프>(1992)는 두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가 약 25㎝ 간격으로 바닥에 일렬로 놓여있다. 한 개의 파이프에는 흑백 모니터가 설치되었고 다른 파이프 반대쪽 양 끝에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영상과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는 마치 파이프를 통과해 보이는 스피커로 나오는 느낌을 주고 스피커를 만지고 조작하기 위해 표면을 누르는 손의 영상이 두 파이프 사이의 틈을 건너 스피커 표면에 투사된다. 잘린 파이프는 몸으로 연결되는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 단면이 되어 스피커와 오브제의 이미지를 오브제 그 자체와 자기 성찰적 텍스트를 읽는 소리에 투사하는 것을 통해 강조되며 오브제와 스피커의 표면에 가해지는 손의 물질적인 조작과 상호작용한다.
2층 전시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약 14m의 영상 작품 <관람자>(1996)는 노동자 17명이 미세한 표정 변화 같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작용도 없이 각자 서서 관람객들을 응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작품 속 주인공인 노동자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기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해 관객은 그 사이에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1991-1992)는 4인치 흑백 모니터와 렌즈가 설치된 일곱 개 원통형의 튜브들로 구성된다. 한 무더기 책들 위로 천장에 매달린 튜브들이 각각 다른 높이로 내려와 있다. 유일한 광원은 펼쳐진 책장 위로 비춰지는 이미지이다. 이미지들은 크기가 각각 다른 책 크기들에 맞춰져 있으며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몸통, 두 개의 몸, 입, 손가락, 텍스트, 손들 그리고 의자 하나로 구성된다. 비디오가 비추는 텍스트들은 모두 모리스 블랑쇼의 『최후의 인간』에서 가져온 발췌문들로, 책장 가장자리에서 불쑥 끝나버리든가, 제본된 부분에서 사라진다. 움직이는 몸과 중첩된 이미지들은 형식적인 공간과 책으로 만든 구조물을 활용한다. 중간에 커다란 손들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지워내는 동작을 하고 관람객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인 표면을 문지르는 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시 이외에도 아카이브 & 미디어 룸을 조성하여 설치되는 작품 이외에 70년대부터의 작가 작품 36점을 볼 수 있는 미디어 아카이브와 작가 인터뷰 영상 및 작가 소개가 담긴 국내외 도서를 비치해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며 작품과 관객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탐구한 작가 게리 힐의 40년간의 작품세계와 현재를 만나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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